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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시물에는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본 게시물은 2013년 11월 경 작성했던 것을 새로 내용을 덧붙여 수정한 것입니다.)


올 해 한국영화계는 솔직히 말해 좀 실망스러웠다. 흥미로웠던 작품이야 많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주목 받을만한 작품이라고 해서 박수와 찬사까지 받을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종상 영화제를 보면서 그 생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남이 주는 상에 딴지 걸 생각은 없지만, ‘고작 저 영화가?’ 싶을 정도의 영화가 상을 너무 많이 탔다. 올 해가 한 달 정도 남은 이 때 올해의 한국 영화를 꼽으라면, 나는 정말 많이 망설이게 될 것 같다. 수없이 많은 상을 탔던 <명량>이 주던 여운보다 더 깊었던 건 <한공주>와 <족구왕>, <만신> 같은 작품들이었다.


말하자면 <명량>은, 순전히 자본의 승리였다. 반도 최대의 멀티플렉스 상영관을 가졌다는 CJ는 <명량>의 흥행에 열을 올렸다. 하루에 수십 수백 건 씩 기사가 오르내리고, 포털은 최단 시간 내 최다 관객 수라며 CJ가 지핀 불에 부채질을 시작했다. CGV 상영관에는 <명량>이 세운 기록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다소 아리송한 내용의 전단이 붙어 있었다. 영화 자체가 수준 미달의 저질은 아니었으니 그 정도의 관객이 모였겠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명량>이 그렇게 대단한 영화인가,하는 의문은 감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본 영화라고 해서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사실 매해 보던 풍경이다. 낯설지 않다. 2012년에는 <광해>가 그랬고, 2013년에는 <설국열차>가 그랬다.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CJ는 자본의 논리에 충실했다. 경쟁작을 스크린에 오래 두지 않았고, 자사의 영화는 개봉 세 달이 지나도록 상영관을 유지했다.


그러나 CJ가 <설국열차>의 흥행에 그렇게 열을 올린 것은 조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작년 7월로 시계를 돌려보자.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 두 개의 문제적 작품이 같은 날 개봉했다. 원래 예정된 개봉일은 8월 1일이었지만, <설국열차>가 하루 앞당겨 개봉함에 따라 <더 테러 라이브>도 날짜를 바꿨다. <설국열차>의 배급은 앞서 말했듯이 CJ가, <더 테러 라이브>의 배급은 롯데가 맡았다. 이 두 수작(秀作)은 여러 가지 의미로 서로에게 '경쟁작'이라 불릴만했다. <설국열차>가 진중하고도 무게감 있는 전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더 테러 라이브>는 숨 쉴 틈 없이 관객들을 몰아붙인다. 두 이야기가 다른 소재, 다른 양상으로 전개됨에도 이 두 영화는 여러 지점에서 맞닿아 있는, 닮은 영화였다.


두 작품의 간략한 줄거리부터 소개해야 할 듯하다. <설국열차(Snowpiercer)>는 영화의 제목임과 동시에, 인간의 욕망으로 다시 빙하기가 도래한 지구를 끝없이 달리는 생존자들이 탄 열차의 이름이다. 이 열차는 세상의 축소판처럼 그려진다. 잘 사는 사람들이 있고 못 사는 사람들이 있다. 부르주아가 있고 프롤레타리아가 있다. 머리칸 사람들은 퍼스트 클래스이며, 열차의 지배자들이다. 제일 앞 칸에는 열차의 주인인 윌포드가 있다. 그에 비해 꼬리칸 사람들은 '윌포드 님의 자비로 열차에 탔으면서 고마운 줄도 모르고 개겨 대는 무임승차자들'이다.


머리칸 사람들은 꼬리칸 사람들을 끊임없이 탄압하고, 자신을 위한 놀잇감으로 삼는다. 이런 현실에 불만을 느낀 꼬리칸의 리더인 커티스는 열차의 현인(賢人)인 길러엄의 말을 따라 혁명을 준비한다. “엔진을 차지하라.” 그는 엔진을 차지해 열차를 평등하고 살만한 공간으로 바꿔 놓고자 한다. ‘저들’만 차지하던 것들을 꼬리칸 사람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가 혁명의 끝에서 마주한 건 참혹한 진실이었다. 그 동안 일어났던 혁명은 열차의 인구를 주기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일종의 지배장치일 뿐이며, 그가 존경하던 길리엄 역시 이 가짜 혁명을 '기획'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열차의 밑바닥에서 부품을 나르는 부품이 된 아이를 발견한다. 그가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열차의 엔진은 사실 오래전부터 고장 나고 있었던 것이다. 윌포드는 커티스에게 열차의 새로운 지배자가 될 것을 부탁하지만, 커티스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자신이 지배자가 된다고 해서, 윌포드와 다른 리더가 되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열차의 리더는 열차라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커티스는 결국 열차의 보안설계자인 남궁민수의 말을 따라 열차를, 작은 세계를 폭파하기로 결심한다.


(여담 1. 이 거대한 은유가, 봉준호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든,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든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열차를 폭파하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해했다. 윌포드가 새누리당, 길리엄이 민주당, 커티스가 유권자, 남궁민수가 좌파 정도로 보였다면, 과한 해석일까.)


<더 테러 라이브(the Terror Live)>의 이야기는 파워게임에 밀려 라디오로 밀려난 앵커 윤영화의 방송에 건설노동자 박노규로부터 테러협박전화가 걸려오면서 시작된다. 에이씨, 기분도 더러운데 장난전화야. 마포대교에 폭탄을 설치해? 웃기시네. 터뜨려라, 터뜨려. 방송이 장난하는 데야 뭐야. 그러나 쾅하는 굉음. 잠시 후 마포대교가 그의 눈앞에서 무너진다. 무섭다. 두렵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는 선인들의 격언을 잊지 않았던 윤영화. 그는 메인뉴스 복귀를 조건으로 박노규와의 통화를 생중계하기로 결정한다.


사상초유의 테러 생중계. 윤영화의 인이어에는 '우리는 국가를 위해 개처럼 일했는데, 국가는 개처럼 일하다 죽은 우리를 진짜 개보듯이 했다'는 그의 목소리가 서럽게 울린다. 그는 마포대교에서 공사를 하다 동료가 죽는 걸 목격한 노동자였다. 그는 아무에게도 이 이야기를 할 곳이 없었다고 했다. 아무도 그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테러범은 대통령을 불러달라고 요구한다. 그에게 사과 받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윤영화는 생방송 중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와준다던 대통령은 현장에 나타나질 않는다. 그는 자신이 앵커로서 저질렀던 비리마저 폭로 당한다. 테러범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그는 반쯤 무너진 스튜디오에서, 검찰이 자신을 본보기로 삼아 처벌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좌절, 희망, 좌절, 그리고 다시 절망과 분노가 반복되는 스크린 속에서 결국 윤영화는 스스로 그가 있는 건물을 폭파시킨다. 건물은 국회 위로 무너진다.


두 영화는 다르지만 닮았다. 약자들의 삶과 목소리를―<설국열차>는 꼬리칸 사람들을 통해서, <더 테러 라이브>는 박노규와 그의 아들을 통해서―보여주고 때로는 대변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인공이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무너뜨리기'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 그러나 두 무너짐은 다르다. <더 테러 라이브>의 그것이 절망과 좌절 끝의 자포자기였다며, <설국열차>의 그것은 체제 밖을 사유하고 모색할 수 있다는 희망을 향한 무너짐이었다. <더 테러 라이브>는 분노의 폭발이었고, <설국열차>는 진정한 혁명의 폭발이었다.


그렇기에 두 작품은 문제적이다. 세계의 문제와 부조리를 지적하고 파괴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진정 문제적인 것은 두 작품을 대하고 소비하는 배급사들의 태도였다. 이 세계를 작동시키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비판하는 영화가 소비되고 진열되는 방식은 더욱 더 '자본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관객수 확보를 위해 개봉일을 앞당긴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CJ CGV에서는 <설국열차>를 더 오래, 더 많이 상영하려 했다. 8월 말이 지나자 <더 테러 라이브>의 상영관을 눈에 띄게 줄이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설국열차>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일까지도 계속해 상영됐다. 롯데시네마라고 다르지 않았다. 자사계열 배급사의 영화를 더 많이 상영하려 했다. 골드클래스 상영관에 앉아 <설국열차>를 보다 졸았다는 한 연예인의 고백은 열차 앞 칸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횡하게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자본주의적으로 소비되는 방식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논술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떠오르는 인문학 팝스타 지젝의 강연을 찾는다든가, 사회를 비평하는 냉소적 지식인이 단지 인기 있기 때문에 예능프로그램에 초대 된다든가, 그런 종류의 책들이 교과부로부터 청소년필독도서로 선정되고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든가. 그러한 역설은 특히 '문화'라는 탈을 쓰고 자행된다. 이 영화는 CJ나 롯데 같은 거대 배급사들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분히 마조히즘적이었다. '돈만 된다면 날 욕해도 좋아'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 했다. 돈만 된다면 날 때려도 좋아.


글쎄, 이쯤되면 잘 모르겠다. 진짜 문제적인 건 영화였을까. 아니면 그 영화를 대하는 당신들의 거만한 자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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