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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 단평

category 봄/리뷰 2015.01.07 00:20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대사처럼,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해 “절대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없”다. 또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 그런 영화이다. 내가 두 번 째로 본 연창호 감독의 작품. (첫 번째는 <창(the Window, 2012)>이였다. <창>에서 ‘군대’를 통해 한국사회를 보여주었다면, <돼지의 왕>에선 ‘학교’라는 거대한 은유를 통해 자본주의의 질서와 계급구조를 비판1)한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너무 현실적이고 너무 음울해서,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이 그 씬 안에서 숨 쉬는 기분이었다. 같이 울고, 같이 맞았다. 같이 때리고, 같이 죽었다.

이 당혹스러운 영화는 너무나 당혹스러운 시퀀스로 시작된다. 무언가에 목이 졸린 채 식탁 위에 죽어 있는 여성. 컴컴한 거실. 곳곳에─심지어 결혼사진 신부 얼굴 위에까지─붙어 있는 차압 딱지. 샤워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비명에 가까운 남자의 울음소리. 그리고 거실 한 켠에서 들려오는 ‘괴물’의 대사. “놀고먹어도 잘 먹고 잘 싸는 그 놈들은 애완견 같은 놈들이야. 그놈들 먹이가 되는 우리는 돼지들이고. 우리는 죽어서 팔, 다리가 찢겨 나가야 가치가 생긴단 말이야.” 이 돼지와 애완견의 이야기로, 이 거대한 우화는 시작된다. 이 대사는 이 영화를 가득 매우고 있는 음울함의 뿌리이며, 하나의 가설이자, 진실이다.

빚 위에 시작한 사업이 망했다. 온 집 안엔 차압 딱지가 붙었다. 희망이 없었다. 말다툼 끝에 아내를 죽이고 말았다. 경민은 그러나 태연하게 중학교 시절의 ‘친구’, 종석에게 전화를 건다. 종석은 글쟁이라는 직함을 내걸고 있지만, 번번한 책 한 권 없이 남의 자서전을 대필하며 먹고 산다. 소설을 쓰지만 계약하겠단 출판사는 없다. 자신을 위해 계약을 알아보던 아내 명미에게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입질이나 하는 주제에”라며 막말을 퍼붓고 뛰쳐나오던 그였다. 그때 경민에게 걸려오는 전화. 그는 놀란다. 그리고 시작되는 회상.

중학교 1학년 1학기. 경민은 돼지이다. 개들에게 끽 소리조차 못하고 괴롭히면 괴롭히는 대로, 때리면 때리는 대로 비굴한 웃음을 짓는다. 종석은 그런 그의 비굴함이 못마땅하다. 어느 날 경민이 쉬는 시간에 숙제를 했다는 이유로 개들에게 맞기 시작하자, 철이가 나타난다. 그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맞을 때마다 그는 그들을 때려눕혔다. 그는 강했다. 그의 아지트에서 철이는, 경민과 종석에게 “더 악해져야 한다.”고 주문한다. “계속 병신처럼 살고 싶지 않으면 괴물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괴물이 되지 못했다. ‘개들’ 사이에 낄 수 있다는 건 착각이었다. 돼지는 돼지였고, 개는 개였다. 돼지들에겐 어떤 힘도 없었다. 철이는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이때를 “절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없는” 때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추억할 수 없는 기억을 만들겠다고 했다. 철이는 몇 번의 싸움 끝에 퇴학당했고, 아침 조회,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돼지의 왕>은 학교라는 공간, 학교라는 현실을 너무나도 잘 옮겨왔다. 남성들 사이에서 더 명백해지는 이 권력관계는 학교라고 피해가질 않았다. 학교가 자본주의 계급구조의 시뮬라크르라면, 이 작품은 시뮬라크르의 아주 잘 만들어진 복제품 쯤 될 것이다. 학교의 계급은 사회의 계급을 닮아 있다. 개들에겐 개들의 룰이 있다. 돼지는 개가 될 수 없다. 개 사이에 끼어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이다. 개들의 충성스러운 장난감이 되거나, 개들의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거나. 반항하려 할수록 가장 먼저 잡아먹힐 뿐이었다. “누가 더 나은 돼지가 될 것인가.” 그러나 멍청한 경쟁이다. 선택은 제한되어 있다. 나 역시 개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 마리 돼지였다. 이 폭력이라는 이데아의 가장 극적인 판본은 사회의 모든 모순과 갈등을 너무나 잔인하게 재현하고 있다.

체육선생은 권력자였다. 학생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의무가 있고, 그럴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방관자였다. 개들이 돼지들의 팔다리를 찢어발기고 물어뜯을 때는 숨어 있다가 돼지들이 꿈틀거리면 나타난다. 이 훌륭한 축사 관리인은, 자기가 계속 먹고 살기 위해서는 누구의 편에 서야하는지 알았던 게 분명하다. 그는 국가권력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 보인다. 그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자의 힘에는 눈을 감으면서, 약자의 꿈틀거림에는 몸서리친다. 어머, 징그러워.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해고할 때는 가만히 있던, 그리고 그것이 별 문제 없다던 국가권력은,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일이서려 할 때마다 번번이 제동을 건다. 돼지들은 가만히 있어야지. 감히 돼지 새끼가 어디서.

학교의 ‘개들’은 옥상 위에 경민과 종석을 불러다 놓고 패며 이렇게 말한다. “야 이런 나쁜 놈들. 니네 자꾸 공부 열심히 해야 할 나이에 할 짓들이 없어서 애들이나 괴롭히고 그러냐. 니네 버릇 오늘 확실히 고쳐야겠다. 그래야 착한 사람 되지.” 이 얼마나 모순적인 얘기인가.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진실이 양, 너무나 떳떳하다. 그러나 사실, 이 사회가 약자를 대하는 방식은 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돼지들의 살려달라는 외침, 파업 한 번에 쏟아지는 손해배상청구, 벌금, 징역. “여러분은 지금 불법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즉시 해산하지 않을 시, 부득이하게 공권력을 투입하여 강제해산하겠습니다.” 돼지들이 지킬 수 있는 법이란, 개들 밑에서 비굴하게 웃음 짓는 것뿐이었다.

철이는 혁명을 일으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바꾸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래봐야 돼지의 왕이었고, 돼지 중의 돼지일 뿐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잡아 먹혔다. 그의 어머니는 경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노래방에서 도우미 일을 하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겠다더니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돼지였다. 철이는 옥상 위에서 ‘쇼’를 했지만, 결코 죽을 마음은 없었다. 그는 죽음이 두려웠다. 그는 계획대로,냐는 종석의 질문에 “미친 새끼. 사람 목숨이 장난이냐? 야 중학교 퇴학당했다고 인생 쫑나냐? 뭐, 간단히 쇼 좀 하고 그러면 퇴학 당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복학시켜주겠지. 이제 엄마랑 둘이 잘 살아 볼 생각해야지.” 종석은 분노했다. 혁명가라고 생각했던 그가, 그냥 돼지였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괴물이 되자”던 그 돼지가 개들 사이에서 지을 비굴한 웃음 때문에 또 분노했다. 그는 철이를 밀어버렸다. 그가 철이를 죽였다.

너무나 현실적이고 음울한 이 이야기는 어두컴컴한 도시를 비추며 끝난다. 나는 돼지였다. 뭐 하나 다를 게 없는 돼지였다. 그래서 너무나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삶의 한 구석을 아프게 찌르는 영화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감히 ‘평’하기가 어렵다. 애완견이 되기 위해 발버둥 쳤던 나는 결국 돼지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마디를 첨언하자면, 연출, 연기. 시나리오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이 괜찮은 수작이다. 2억이 채 안 되는 저예산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어 낸 연상호 감독에게 감탄하면서, 또 이런 작품에 2억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몇 가지 단점이 눈에 띌 수는 있지만 그 몇 가지 단점이 가려질 만큼, 엄청난 흡입력을 가진 잘 만들어진 영화임이 분명하다.

1) 사실 <창>은 2012년 작이고, <돼지의 왕>은 2011년 작이니 시간 순으로 따지자면 반대로 얘기하는 게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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