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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단평.

category 봄/리뷰 2014.12.28 22:10


 

이 영화는 국제시장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도 않고,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도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인 덕수 역시 국제시장에 머무는 장면은 길지 않다. ‘국제시장은 이 영화의 이야기의 중심부, 핵심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 국제시장은 이 영화의 형식적인 제목에 불과하다. 국제시장이라는 이름보다 더 눈 여겨봐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부제 'Ode to My Father'이다. 윤제균 감독이 그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 혹은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영화. 사실, 이 영화의 제목은 국제시장따위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었어야 할지도 모른다. <국제시장>은 오로지 이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보여주려고 런닝 타임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국제시장>은 기본적으로, ‘회상의 영화이다. ‘고생역사라는 카테고리로만 묶어 놓은 사건들을 붙여 놓으니 시간순대로 이야기를 전개할 수는 없다. 사건 간의 맥락이란 게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 사건 사이사이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없잖아. 윤제균 감독은 그래서 회상이라는 손쉬운 선택을 한다. 현재와 과거, 과거와 현재를 계속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청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택한 것 역시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 사이사이를 매우는 현재가 너무 빈약해보이기만 하다. 그 연결방식이 너무 맥락 없어 심지어는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림으로만 이야기하기 벅찼는지, 처음부터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갑자기 덕수의 목소리가 상황을 설명한다. 그렇게 쌩뚱 맞게 나타난 나레이션은 관중의 영화 몰입을 방해하고 만다. 보통 사람이 혼자 회상을 할 때 자기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해주진 않는다는 걸 감독은 몰랐던 모양이다.

 

굵직한 현대사를 겪어나가는 덕수의 이야기는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덕수는 포레스트 검프만한 성장을 보여주지도, 성취를 해내지도 못한다. 오히려 너무 일관적이고, 너무 평면적이어서 이야기가 단조로워지는데 일조한다. 사건을 겪으며 사람이 발전하지는 못해도, 어떻게든 변하기 마련인데 덕수는 너무 담담하게 무덤덤하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단순함으로 따지면 <콩쥐 팥쥐>의 콩쥐나 <흥부전>의 흥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기세다. 캐릭터의 개성도 특징도 없다. 심지어 그는 주체적이지도 않다. 감독이 내던진 훈련장에서 까라면 까고, 구르라면 구르는류의 캐릭터는 영화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덕수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 고생을 한다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대입가능한 캐릭터성이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현대 영화의 캐릭터라면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데 쓰이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나. 그런데 <국제시장> 안에서의 덕수는 죽어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피아노줄에 매달린 마리 앙뚜아네뜨를 보는 느낌이다. 감독은 캐릭터의 단조로움을 조연들로나마 미미하게 극복할 뿐이다.

윤제균 감독은 아버지가 고생했다.’는 것만을 설명하는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고생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가 살아 온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돌아보는 건 잊어버린 듯하다. ‘고생하신 아버지는 존경스러울지라도, 감독이라면,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두어서도 그대로 담아서도 안 된다. <국제시장>영화이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시간의 해석을 포기한 감독이 무슨 감독이야. 윤제균은 이 시점에서 그럴듯한 재현에 집중하느라 영화를 포기해버리고 만다.

 

이 영화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다다. 이게 전부다. 그런데 고작 이 정도 영화가 무슨 대단한 영화사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이렇게 핥아 대는지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 아버지가 존경스러웠으면, 아버지 어깨나 한 번 더 주물러 드릴 일이지, 일베로 대표되는 극우 진영의 사냥꾼들은 왜 비평의 영역을 넘어 영화를 찬양하고 그 찬양을 타인에게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26>의 놀라운 영화적 덜떨어짐에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아니면 진짜 좋은 영화라고 본건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칭찬을 마지 않던 이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절대, 그 정도의 칭찬을 받을만한 영화가 아니다. 그냥 그런 영화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원작에 대한 존경으로 탄생한 영화들을 상기해보자.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훌륭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자기 마음에 드는 얘기를 했다고 해서 훌륭한 영화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서울 축이 압도적이네요.” 트리움 김도훈 대표의 말이다. 담론 지도는 아버지-서울축이 경부고속도로처럼 중심축을 이뤘다. “이 친구들한테 재밌는 게, 아버지의 삶을 거의 그대로 내면화합니다. 젊은 때는 아버지와 같은 권위에는 반항도 하기 마련인데 그런 게 없어요.” 그럼 서울은 뭘까? “상세 분석을 보면, 경상도에서 어렵게 자란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와서 나름 자리를 잡습니다. 인터뷰를 한 친구들이 그 서사를 자랑스러워하고 닮고 싶어해요.”

 

<시사인>의 따르면, 일베 이용자들의 글을 분석하고 인터뷰한 결과, 이들은 공통적으로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일베 이용자들이 진술하는 아버지에 대한 서사와, <국제시장>의 서사는 많이 닮아있다. 그것이 일베 이용자들이 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이 영화에 대한 올바른 비평에 아버지 세대가 하신 고생 덕에 편히 먹고 살며 영화 평론이나 하는 주제에이 영화에 대해 운운하냐는 뉘앙스로 반박한다. (이 영화가 영화 자체로서도 잘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과는 실은 큰 상관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 위에 덕수의 대사가 겹쳐진다. “이 고생을 우리 아들이 아닌 우리가 해서 다행이야.” 사실 웃기는 이야기이다. 이 대사를 교묘히 써먹는 우익 파시스트들은 젊은 세대의 고생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쉽게 정의 내린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하신 고생(한국전쟁, 베트남전, 파독)에 비하면 그까짓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한 소리인가. 비교불가능한 고생의 정도를 근거 삼아 사회에 대한 모든 비판과 모든 문제제기를 배부른 소리로 취급한다는 게. 적어도 똑바로 이 영화를 봤다면, “, 아버지가 고생하셔서 우리가 편안하게 살 수 있었구나. 아버지에게 효도해야겠다.” 다음에는 우리 자식 세대들이 고생하지 않게 (우리 아버지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겠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했다. 아니, 거기까지는 못 가더라도 지금의 20, 지금의 30대가 겪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편안한 소리로 만들어서는 안 됐다. 나는 그렇기에 이 영화보다, TV조선과 일베를 비롯한 우익들이 텍스트를 소비하는 방식을 더 비판하고 싶다. “, 허지웅이 그런 말을 했어? 테러해. ? 김태훈이? 이 새끼 가만 안 둬. 듀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우리 아버지 세대가 고생한 걸로 호위호식하는 좌파 새끼들.” 나는 이들에게 기어이 파시스트라고 이름 붙이고 말 것이다.

 

다른 이야기1.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똑같이 영화 속에 등장했던 탄광 노동자들의 이야기,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팔지 않았다면 얼마 안 되는 보상금 받고 가게를 철거당했을 또 다른 덕수의 이야기에는 눈을 감는다면, ‘아버지의 고생운운한 게 대체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다른 이야기2. 영화음악은 영화에 비해 꽤 훌륭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병우 감독의 작품이더라.

 

다른 이야기3. 쓸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이만 적는다. 매번 제목만 단평이라고 써놓고 길게 쓰게 된다. , . 생각이 짧으니까 단평이다. 영화보고 바로 쓴 거니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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