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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기방의 시대다. 대불황의 시대다.

category 씀/칼럼 2017.02.20 05:04

뽑기방의 시대다. ⓒ한국일보


뽑기방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뽑기방에 갔다. 그러니까, 작년 말쯤이었던 것 같다. 즐겨 찾던 국밥집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이 ‘뽑기방’이 대신한 때 말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나였다. 둘이 됐다. 금방 셋이 됐고, 그 후에는 번화가 큰 건물에는 하나씩 꼭 생겼다. 그 골목엔, 이윽고 편의점 수만큼 많은 뽑기방이 생겨났다.


어디까지나 등록업체 기준이다. ⓒ서울신문



한 동네의 트렌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웬만한 번화가에는 꼭 몇 개씩 뽑기방이 있었고, 사람들은 늘 인형을 뽑으려 애쓰고 있었다. 15년에는 21개(게임물관리위원회 등록 기준)였다던 뽑기방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후반기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지금은 수천 곳 이상이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뽑기방의 성행은 그 자체로 불황의 증명이다. 경제가 크게 몰락했던 일본의 90년대, 거리에는 피규어와 인형을 뽑을 수 있는 가게가 성행했다. 한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날마다 불황을 전하는 뉴스가 계속되고 있다. 생계형 범죄는 급증했고, 금은방이 다시 성행한다. 지난해 로또 판매량은 역대 최고를 기록했고, 저소득층의 복권 구매는 두 배가 늘어났다.


즐거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연합뉴스



가난한 취미, 간편한 탕진

그러니까, 그만큼 먹고살기 힘들어졌다는 얘기다. 이미 밥 굶은 이들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타인의 것을 무단점유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요행을 바라거나. 뽑기방은 그 모두를 거부한 이들의 저렴하고 가난한 취미생활이었다.


몇 천원은 금방이대... ⓒ현이씨 '즐거우리 우리네 인생'



동시에 간편했다. 지폐 한 장만 넣으면 크레인을 몇 번 휘적휘적 움직인 후 버튼을 누르면 나의 노력이 이 인형에게 간택 받을만한 것인지 아닌지가 쉽게 결판난다. 학습, 가사, 직장. 어떤 노동이건 저렴하고 길게 시달려야 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가장 적당한 곳이 바로 뽑기방이다.

인형 뽑기에 탁월한 테크니션이 아닌 한 결국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는다. 이 조그마한 크레인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한 기회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1,000원짜리 한 장에 망나뇽도, 피카츄도 뽑을 수 있다. 뽑지 못하더라도 크게 아쉽지는 않다. 값싸고 저렴하며, 시간까지 적게 드는 불황용 취미.

아주 저렴하게 뽑기방의 주인이 되세요

뽑기방이 늘어난 건, 단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서만은 아니다. 다른 가게를 차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뽑기방 프렌차이즈(그렇다. 여기에도 프렌차이즈가 있다.)에서 빌려주는 기계 대여비, (거의 들지 않는) 인건비와 세금, 월세 정도면 당신도 뽑기방, 차릴 수 있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건 따로 있다.


저렴한 창업비용은 사람을 불러모은다. 포털 연관검색어에는 뽑기방 창업이 함께한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이 되기 때문에, 기계를 조작하곤 한다. 결국에는 다시 요행. 크레인 앞에서 노력한 사람보다 운이 좋거나 돈을 많이 쓴 사람이 이기게 되는 게임이 된다.


정말 들 힘만 주셨다... ⓒMBC


몇 번에 한 번꼴로 뽑히도록 집게발의 힘은 쉽게도 조절된다. 인형을 들어내는가 싶더니, 집게의 힘은 맥없이 풀린다. 불황 속 호황을 누리기 위해 누군가는 타인의 운조차 조작해버렸다. 이것은 마치, 로또다. 운이 좋으면 뽑고, 그렇지 못하면 천 원을 날린다. 그야말로, 대도박의 시대이자 대불황의 시대, 여기서도 누군가의 불황은 누군가의 호황이다.

나는 오늘 뽑기방에 갔다. 아무것도 뽑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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