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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리지 않기로 했다.

category 일상다반사/에세이 2016.04.16 02:50


누구나 시간을 되돌리길 꿈꾼다. 일주일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한 달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니 단 하루, 한 시간 전으로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머릿속으로 그때의 그때를 떠올린다. 되감는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스스로의 실수와 미숙함과 멍청함을 되뇌이며 좌절과 낙담과 절망을 만끽하고 있을 때.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은 다르게 행동할 거라고,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분명 무언가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몇 주 전 동네 슈퍼에서 샀던 누텔라와 아이스크림 영수증에 적혀 있는 날짜를 보며 생각한다.


망쳐버린 시험 탓일 수도 있겠다. 떨어진 면접 탓일 수도 있겠다. 친구에게 준 상처 때문일 수도, 깜빡 잊고 지나쳐버린 마감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이 놓쳐 버린, 혹은 당신을 놓아 버린 연애 때문일 수도 있다. 아주 사소한 날들의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 하나하나 발목을 붙잡는다. 너무나도 사소한, 그래서 너무나도 쉽게 돌아갈 수 있을 듯한.


이를테면 핸드폰에 쌓인 부재중 전화, 먹다가 배가 불러 냉동실에 그냥 넣어 둔 뽕따, 두 잔만 마시고 다음을 기약했던 쉰내 나는 막걸리, 어느 춥고 추운 날 입었던 빛바랜 야상, 보다 말았던 어느 영화의 DVD나, 선물 받았다가 아까워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로 두었던 어느 인디밴드의 음반, 이름이 크게 적혀 있는 다이어리 같은 것들, 이 사소해서 구질구질한 것들이 모두 나를 과거로 데려다 놓는다.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에미트 브라운 박사가 없어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추억을 버벅이며 더듬는 게 최선이지만. 그리고 그 끝에는- 오직 후회 또 한숨만이 남는다.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이미 벌어진 일들이 나의 발목을 계속 잡는다. 시간은 열두 시를 넘겼는데, 이미 해는 떴는데, 해도 뜨고 아침 먹을 시간도 됐는데! 젠장. 아침을 먹을 수가 없다. 내 뇌가 밥을 거부한다. 몸이야 오늘에 와 있지만 내 뇌는 일이 벌어진 그 날 속에 처박혀 있어서일까.


잠을 자고, 눈을 뜨고, 출근하기 위해 일어나고, 길거리 크게 틀어진 음악 소리를 듣고, 점심시간에도 입맛이 없어 편의점 전주비빔밥 삼각김밥으로 배를 대충 채워 넣을 때도.  내 뇌는 이곳에 없다. 어제의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 뇌 좀 여기로 빨리 보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이럴 때마다 찾게 되는 영화가 있다. 리처드 커티스 감독의 <어바웃 타임>이 그것이다. 주인공 팀 가문의 남자들은 대대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어두운 곳에 들어가 주먹을 꾹 쥐고, 두 눈을 꼭 감으면 어느 샌가 과거로 돌아와 있다. 아쉽게도,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문어를 잡거나, 오드리 헵번과 사랑에 빠질 수는 없다. 오직 자신이 경험했던 과거만을 다시 겪을 수 있기에.


모태솔로였던 팀은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이름은 메리. 그녀의 전화번호를 받고 돌아온 날 밤, 팀은 시간을 되돌려야 했다. 그의 룸메이트가 절망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덕분에 메리의 전화번호는 사라진다. 메리를 어렵사리 다시 만나지만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애인까지 생겨 있다. 팀은 다시 시간을 돌린다. 돌린다. 돌린다.


메리에게 애인이 생기던 그 날 밤으로 돌아간 팀은 그녀에게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한다. 메리는 그녀를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팀에게 반한다. 둘은 사랑한다. 동거를 시작한다. 팀은 어느 날 밤, 잠들어 있는 메리를 깨워 청혼한다. 결혼해 달라고. 둘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아들도 딸도 생겼다.


시련이 닥쳐온다. 아버지가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담배를 펴왔던 게 그 원인이었지만, 아버지는 부러 시간을 돌리지 않는다. 시간을 뒤로 돌린다면, 다시 돌아온 현실의 아들과 딸이 사라질 수도(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전, 능력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었는지를 전한다. 하루를 두 번 사는 것이다. 첫 번째는 평범하게, 두 번째는 거의 비슷하게, 하지만 처음엔 긴장과 걱정 때문에 볼 수 없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덕분에 팀은 보지 못했던- 또 보지 못할 뻔 했던 삶의 행복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는 죽었다. 팀은 종종 아버지를 만나러 과거로 돌아간다. 산책, 탁구, 사소한 농담과 포옹을 즐긴다. 아주 사소해서 아주 아름다운 것들. 하지만 셋째 아이의 출산이 다가온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다. 바닷가에서의 짧은 산책을 끝으로, 팀은 아버지를 영영 떠나 보낸다.


그 후 팀은- 잘 살아간다.  잘 살아간다. 남들이 그러듯. 다시 평범한 행복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진다. 아버지가 발견했던 행복의 법칙보다 위대한 법칙을 깨닫는다. 시간 여행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이미 그 하루를 위해 시간 여행을 했던 것처럼,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일을 완전하고도 즐겁게 느끼면서 말이다.


<어바웃 타임>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부러 시간을 돌리려 애쓰지 말라는 것이다. 빨간 머리의 시간 여행자조차도 그럴진대, 벽장에 들어가 눈을 꾹 감는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우리가 그럴 이유는 더욱 없는 것 같다.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와 취한 채 보내버린 문자.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과 이미 해버린 일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한숨을 쉬는 것은, 당신의 한숨을 더 깊게 만들 뿐 무엇도 더 ‘낫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를 통해 무언가를 배웠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타임머신이 발명되기 전까지 우리는 과거에 벌어진 일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실은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당신의 선택은 똑같을지 모른다.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당신은 당신이고, 당신의 선택은 선택이다. 자신이 했던 과거의 선택을 저주하며 스스로를 부러 미워할 필요도 없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얼 할 수 있단 이야기일까. 씨발. 이런 상황에서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고뇌하는 것 외에 대체 무슨 선택권이 있단 말인가. 계속 생각나는 걸 어쩌라고. 하지만


정말 선택권이 없을까. 뇌를 어제 그 장소에 계속 두고 있을 생각이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현재다. 과거에 붙잡혀 지금의 그 어느 것도 붙잡지 못한다면 결국 후회할 시간이 늘어날 뿐이다. 당신이 후회하든, 후회하지 않든 시간은 간다. 지금을 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진 또 다른 옵션이다. 과거의 자신에게 상처 받지 말고, 미래의 당신을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것. 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그곳에 너무 많은 힘을 빼앗길 필요는 없다. 이미 끝난 일이다. 고생했다. 우리가 되돌릴 수 없는 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냥 괜찮다. 정말로 괜찮다. 애썼다.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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