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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피로를 풀어드립니다

category 씀/피쳐 2016.03.28 10:36

 

1,770시간. OECD 회원국의 연 평균 노동시간이다. 한국의 연 평균 노동시간은 이에 350시간이 더해진다. 2124시간. 24개국 중 멕시코에 이은 2위였다. 1년에 1,302시간을 일하는 독일보다 4개월을 더 일하는 셈이다. 대한민국에서 일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 피곤한 일이다. 잦은 야근과 잔업, 밤샘과 연장근무, 주말출근과 늦은 회식. 그런 대한민국에 이제.

낮잠이 팔리기 시작했다. CGV 여의도점이 시작한 시에스타얘기다. 오후 열두 시에서 한 시까지,직장인들의 점심시간에 맞춰 잠들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준다. 낮잠을 위한 차, 낮잠을 위한 아로마향과 새가 지저귀는 소리, 낮잠을 위한 넓다란 담요와 편안한 슬리퍼와 눈의 피로를 덜기 위한 두터운 안대. CGV는 만 원짜리 한 장에 피로를 풀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시에스타를 만든 것들

몇몇은 거대자본의 욕망을 비판했다. 차등좌석제에 이어 돈독이 올랐다는 비난. 반면 환호하는 이들도 많았다. 매번 수면이 부족하지만 정작 직장에서 잠을 청할 수는 없는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서비스라는 것이다. 자도 되고, 안 자도 되고 그만인 것으로 취급하기에, 피곤에 이들에게 한 시간의 짧은 낮잠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변화는 생각보다 더 크다.

전날 야근에 찌든 직장인도, 낮잠 20분이면 훨씬 더 깨어 난느낌을 받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낮잠은 뇌 우반구를 활성화시켜, 더 창의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업무성과를 올려줄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를 줄여주어 더 나아진 기분으로 일 하게 만든다. 점심시간의 낮잠 한 시간이면 업무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공급이 수요를 만들긴 하지만, 아무런 수요 없이 공급이 계속되긴 힘들다. CGV 여의도점이 시에스타를 시작한 후, 낮잠을 청하러 이곳을 찾는 이들이 점차 생겨나고 있다. 낮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밤샘의 피로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과로의 불균형

과로사회다. 누군가는 1년에 2,000시간이나 넘는 노동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 , . 일이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8시에 출근에 밤 11시까지 퇴근하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다음 날 아침까지 회사에 남아 있는다. 퇴근하자니 눈치가 보이고, 퇴근인 줄 알았더니 회식이 기다린다. 퇴근을 한다 해도, 카톡과 문자 메시지로 업무지시가 이어진다.

동시에 무로(無勞)사회다. 1년에 2,000시간이나 넘는 노동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수십만원 짜리 과외를 받고, 면접장에서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 발버둥친다. 일을 구하는 것 자체가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 심각한 과로의 불균형, 노동의 양극화는 양쪽 모두에게 불행만 안겨줄 뿐이었다.

누군가 전혀 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갔어야 할 일이 몇몇의 노동자들에게만   몰린다면, 그 결과는 당연히 과로일 수밖에. 이 불균형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밤새도록 일하게 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들이 밤을 새서 일하게 한 것일 것. 답은 뻔하다.

 

당신의 밤샘을 풀어드립니다

거대한 사업과 거대한 욕심,이다. 필요 이상으로 직원 수를 줄이고,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노동을 소수의 생존자에게 몰아준다. 노동의 몫을 분담할 이들은 몇 푼 아끼겠다는 갑님의 사정으로 유입되지 않고, 덕분에 누군가는 밤을 새야 한다. 누군가는 반드시 피곤해야 한다. 누군가는 반드시 과로해야 한다.

시에스타. 여기서 피로를 풀고 가라는 달콤한 유혹. 어제 밤을 샌 피곤함. 한 시간만 쉬고 가세요. 한 시간의 낮잠이 당신이 일을 더 잘 할 수 있게 만들어 줄 거예요. 사실은 좀 우스운 이야기다. 거대한 사업이 만들어 낸 거대한 피로. 그 만연한 피로를 풀기 위해 이제 새로운 사업이 시작됐다.

CGV의 새로운 도전이 과연 그들이 원했던 것만큼의 성공을 얻어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이것만은 분명하다. 한때 핫식스와 박카스가 그랬고, 지금 CGV가 여러분 눈 앞에 펼쳐 놓은 것처럼, 앞으로 여러분을 피로하게 했던 사업가들이, 피곤함을 위로해준 대가로 당신의 지갑을 훔쳐 갈지도 모른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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